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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십니까,대한민국의 위대한 첫 걸음

파파원주 2015. 3. 10. 17:50

[조선일보 창간95/FIRST & BEST] 

 기억하십니까, 대한민국의 위대한 첫 걸음

                                            전봉관 KAIST 인문사회학부 교수

시작은 미약했지만…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비전과 의지로 未來를 열었다

 
에디슨이 발명한 탄소필라멘트 전구가 가로등으로 설치돼 뉴욕의 밤거리를 밝히기 시작한 것은 1882년이었다. 그해 미국과 수교한 조선은 이듬해 민영익·홍영식 등을 보빙사(報聘使)로 임명해 미국으로 파견했다. 조선이 서양으로 파견한 외교 사절 제1호였다.

샌프란시스코·워싱턴·뉴욕·보스턴 등을 시찰한 민영익 일행은 궁궐에 전등을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1884년 9월 에디슨 컴퍼니와 전등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순조롭게 계획이 추진되었다면, 조선은 미국보다 2~3년 늦게 전등을 도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해 12월 갑신정변이 발발해 실제로 건청궁에 전등이 설치된 것은 1887년 봄이었다. 뉴욕보다 5년 남짓 늦었지만, 현재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뒤늦은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897년 12월에는 조선 제1호 전기 회사인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었다. 1899년 서울을 동서(본선)와 남북(용산선)으로 잇는 전차 2개 선이 개통됐고, 1900년에는 서대문과 남대문을 잇는 전차 노선(의주선)이, 종로에는 가로등 3개가 설치됐다. 그러나 한성전기회사는 미국의 자본과 기술에만 의지한 나머지, 얼마 못 가 경영권이 미국으로 넘어갔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다시 일본으로 넘어가 일한와사(瓦斯·가스)주식회사로 개편됐다.

이렇듯 조선은 근대적 제도와 문물의 도입은 늦었지만, 역설적으로 '이권'을 노린 열강의 다툼 속에서 전기·철도·항만 등 근대적 국가 시설 건설 자체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근대적 과업을 수행하겠다는 비전과 의지가 부족했고, 그것을 주도할 인재를 양성하지 못해 근대화에 실패하고 결국 국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제1호'는 구한말 근대화 과정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 등장했다.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일시에 빠져나간 데다가 정부 조직이건 산업체건 고위직으로서 의사 결정 경험이 있는 한국인은 얼마 없었다. 가난한 신생 독립국에 선뜻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국가도 없어 미국의 구호물자에 의지해 근근이 버텨나가는 처지였다. 분단과 6·25전쟁은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을 최악으로 치닫게 했다.

1948년 5월 14일 북한은 남한의 '단독 총선'에 항의하며 송전을 중단했다. 당시 수풍수력발전소를 비롯해 대부분의 발전소는 북한에 있었다. 남한은 전력 수요량의 60% 정도를 북한에서 공급받고 있었다. 대한민국 제1호 발전소 '목포 중유발전소'는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건설되었다. 1948년 12월 민간 기업이던 남선전기주식회사가 원조 자금으로 기공한 목포 중유발전소는 5000㎾ 용량으로 오늘날로 보면 약 2000가구 정도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소규모 발전소였다. 그마저도 완공된 지 1년 만인 1950년 7월 6·25전쟁 와중에 폭격으로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무기력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발전소를 건설해 1964년 4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제한 송전이 사라졌다. 7년여의 공사 끝에 1978년 4월 고리원자력 1호기가 완공되며 '원전 시대'를 열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영광도 있다. 전자·자동차 등 각 분야의 ‘대한민국 제1호’는 열악한 환경에서 출발해 오늘날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제품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영광도 있다. 전자·자동차 등 각 분야의 ‘대한민국 제1호’는 열악한 환경에서 출발해 오늘날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제품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①금성사가 국내 최초로 내놓은 TV ‘VD-191’(1966년·왼쪽)과 LG전자의 첨단 ‘올레드 TV’. ②삼성전자의 첫 휴대폰 ‘SH-100’(1988년·왼쪽) 개발 역량은 스마트폰 ‘갤럭시S6’로 이어졌다. ③1896년 포목점 ‘박승직 상점(왼쪽)’으로 출발한 국내 최고(最古) 기업 두산은 중공업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서울 을지로 6가에 있는 두산그룹 본사. ④현대차는 국산 고유 모델 1호인 ‘포니’(1975년·왼쪽)를 거쳐 고급 세단 ‘제네시스’로 세계를 호령한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가장 품질이 좋고 값싼 전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 데에는 1954년 4월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 국제원자력학교에 첫 국비 원자력 연구요원으로 파견된 윤세원·김희규 등 '원자력 유학 1호'의 역할이 컸다. 외환은 단돈 10달러를 쓸 때도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야 했던 시절, 이승만 정부는 10개월 연수 기간 1인당 학비가 6000달러나 드는 '원자력 유학생'을 4년간 8차에 걸쳐 150여 명이나 내보냈다. 

어느 분야든 '대한민국 제1호'의 첫걸음은 한없이 미약했다. 1955년 8월 자동차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은 국산 자동차 제1호 '시발(始發)'을 출시했다. 엔진과 변속기는 미군이 사용하던 지프형 차의 부품을 활용하고, 차체는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드럼통을 망치로 펴서 만든 6인승 지프형 승용차였다. 국산 흑백 TV 1호인 금성사 'VD-191' 500대가 출시된 것은 국영 KBS TV가 개국한 지 5년여가 지난 1966년 8월이었다. 'TV 같은 사치품을 만들 부품을 수입하기 위해 가뜩이나 부족한 외화를 낭비한다'는 부정적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금성사는 'TV 부품 도입에 소요되는 외화는 라디오를 수출해 벌어들인 달러를 활용한다'는 등의 조건을 내걸어 부품 수입 허가를 받았다.

이렇듯 열악한 상황에서 출발한 '대한민국 제1호들' 덕분에 현재 대한민국은 반도체·조선·휴대전화·자동차·제철·정유·화학공업 등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할 수 있게 됐다. 산업 분야에서 시작된 세계시장 경쟁력은 2000년대 이후 한류로 대표되는 문화산업 영역으로 확대됐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세계시장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뚜렷한 비전과 의지, 그것을 주도할 수 있는 수많은 인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성장한 분야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김치, 막걸리 등 한국 고유의 일부 먹거리를 제외하면 '대한민국 제1호'가 세계인의 식생활과 문화를 풍요롭게 한 '세계 제1호'로 발돋움한 예는 아직 많지 않다. 한국의 지난 100년이 앞선 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갔던 시기였다면, 향후 100년은 수많은 '세계 제1호'를 탄생시키는 시기여야 한다.

금성 TV, 삼성 휴대폰, 현대 포니… 가난한 나라의 공장, 기적을 만들다

박순찬 기자

라디오·비디오… 안방의 기적
LG 전신 금성, 최초 라디오·세탁기 등 쏟아내…
삼성은 비디오 등 新시장 개척 나서

 
한국 최초 제품들은 우리 안방과 거실 풍경, 한국인의 삶을 바꿔놓았다. 팍팍했던 삶은 라디오·TV·VCR(비디오카세트리코더) 덕에 한층 풍요로워졌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 1950년 6·25전쟁 발발 등 라디오는 희로애락을 국민과 함께했다. 한국 최초 라디오는 1959년 11월 탄생했다. 금성사(金星社·현 LG전자)가 내놓은 진공관 라디오 'A-501'이다. 특유의 왕관 모양 로고와 '골드스타(GoldStar)'란 상표가 붙었다. 가격은 한 대에 2만환 정도. 갓 대학을 졸업한 금성사 직원의 월급이 6000환이었으니, 석 달 치 월급을 꼬박 모아도 사기 어려운 고가(高價)였다. 
 

    1 국내 최초 가정용 에어컨인 금성사‘GA-111’.1968년 첫 선을 보여 총 1000대를 생산했다. 2 국내 최초 전자레인지, 삼성전자‘RE-700D’. 일본 제품을 모델삼아 2년 연구 끝에 개발했다 3 국내 최초 선풍기, 금성사 ‘D-301’. 12인치 알루미늄 날개와 쇠파이프를 휘어 만든 몸통을 썼다.
      1 국내 최초 가정용 에어컨인 금성사‘GA-111’.1968년 첫 선을 보여 총 1000대를 생산했다. 2 국내 최초 전자레인지, 삼성전자‘RE-700D’. 일본 제품을 모델삼아 2년 연구 끝에 개발했다 3 국내 최초 선풍기, 금성사 ‘D-301’. 12인치 알루미늄 날개와 쇠파이프를 휘어 만든 몸통을 썼다.
 

2007년에는 'TV쇼 진품명품' 프로그램에 등장해 1500만원이란 감정가를 받기도 했다. 금성사는 1960년엔 국내 최초 선풍기(D-301)도 내놓아 사람들의 부채질을 줄여줬다. 

한국 최초 TV가 출시된 것은 라디오가 나온 지 7년 뒤인 1966년 8월이었다. 기술력은 갖췄지만 당시 정부가 TV 사업 허가를 빨리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성사가 내놓은 19인치 흑백 TV 'VD-191'의 값은 6만3510원. 역시 대졸 신입 사원 넉 달 치 월급과 맞먹었다. 쌀 27가마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데도 국민의 호기심과 첫 국산품이라는 자부심 덕에 주문이 몰렸다. 결국 공개 추첨으로 당첨된 사람에게만 팔았다.

한국 최초의 '컬러TV'는 1974년 3월 아남전자(당시 한국나쇼날전기)가 개발했다. 일본 마쓰시타전기와 합작해 만든 컬러TV 'CT-201'이었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과소비와 계층 간 위화감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컬러TV 방송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신군부가 들어선 1980년 8월에야 컬러TV 시판을 허용했고, 이듬해부터 컬러TV 방송이 시작됐다.

'비디오테이프'를 보는 재미를 알려준 것은 삼성전자공업(현 삼성전자)이었다. 삼성은 당시 높은 기술력을 갖고 있던 일본 업체와 제휴를 추진했다. 하지만 일본은 "VCR 기술만큼은 절대 다른 나라에 전수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결국 1978년 자체 개발로 선회했다. 개발 요원 5명이 일본 빅터(JVC)사의 신제품을 분해해가며 기술을 익혔다. 삼성은 개발비 60억원을 들인 끝에 1979년 5월 국내 최초 VCR을 개발했다. 일본, 독일(당시 서독),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 네 번째였다.

'주방의 혁명'이라고 한 전자레인지도 삼성전자가 국내에 처음 내놨다. 1970년대 중반 미국·일본에서 전자레인지가 선풍적 인기를 끌던 때였다. 삼성은 일본 파나소닉의 기계식 제품을 모델로 삼아 연구에 착수한 지 2년 만인 1978년 11월 전자레인지 개발에 성공했다.

세탁기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금성사는 1969년 5월 국내 최초 세탁기인 백조세탁기(WP-181)를 개발했다. 당시만 해도 주부들의 고된 가사 노동인 '빨래'를 기계가 대신해준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금성은 '빨래는 시간의 낭비입니다'라는 신문 광고를 냈다.

하지만 부품 대부분을 일본 히타치사(社)에서 수입하는 바람에 국산화율은 5%에 불과했다. 시장 반응도 미지근했다. 주부들 사이에선 '세탁기는 사치품'이라는 인식이 많았다. 결국 금성사는 세탁기 생산을 일시 중단했고, 5년 뒤인 1974년이 돼서야 생산을 재개했다. 

    세계 최초 자체 통신 스마트워치 삼성전자의‘기어S’.
      세계 최초 자체 통신 스마트워치 삼성전자의‘기어S’.
 

한국인의 삶을 바꿔놓은 제품으로는 스마트폰을 빼놓을 수 없다. 삼성은 세계 최대 스마트폰 제조 기업이다. 매출 점유율로도 삼성·LG는 '톱3'에 이름을 올린다. 한국에서 휴대전화 서비스가 시작된 1988년, 삼성전자는 독자 개발한 첫 휴대전화 'SH-100'을 선보였다. 

'휴대전화=모토로라'라는 세간의 인식을 깬 일대 사건이었다. 삼성은 1996년 세계 최초 디지털 휴대전화(CDMA폰)를 선보인 데 이어 카메라 내장, 동영상 촬영, 안테나 내장, 화면 가로 회전 등 각종 혁신 제품으로 시장을 주도해왔다. 지난 1일(현지 시각)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선보인 스마트폰 '갤럭시S6'도 삼성의 혁신성과 디자인을 집약한 역작(力作)으로 평가받는다.

KT, 120년 전 전화 서비스… 휴대폰은 SKT가 최초

강동철 기자

정보통신 강국, IT의 기적
"백범의 사형집행 당장 멈추어라" 덕수궁 살던 高宗, 인천항에 전화

 
 

1896년 조선의 수도 한성 덕수궁에 한국 첫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됐다. 인천항과 덕수궁을 잇는 이 전화는 덕률풍(德律風)이나 득률풍(得律風)이라고 했다. '텔레폰(telephone)'에서 유래한 말이다. '말을 전하는 기계'라는 의미로 '전어기(傳語機)'라고도 했다.

이 전화기의 주 사용자는 당시 조선의 황제였던 고종. 전화를 두고 고종과 백범 김구 선생 사이에 잊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1896년 8월 26일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던 김구 선생의 소식을 전해 들은 고종이 인천항으로 전화를 걸어 사형 집행을 중단시킨 것이다. 덕수궁과 인천항 사이에 전화가 가설된 지 사흘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만약 전화가 없었다면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도 22세로 세상을 떠나야 했을지 모른다.

물론 고종이 사용하기 전에 처음 전화기를 들여온 인물은 따로 있다. 1882년 3월 중국 톈진(天津)에서 돌아온 유학생 상운(尙澐)이 가져온 전화기 2대와 전선 일부가 한국 최초 전화기였다. 하지만 실제로 가설된 전화를 사용한 인물은 고종이 처음이다.

한국 최초 전화국은 1885년 설립된 한성전보총국이다. 이곳은 130년이 지나는 동안 체신원, 체신부, 한국전기통신공사, 한국통신공사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2001년부터 KT가 됐다. KT 사옥이 있는 광화문은 한성전보총국이 처음 들어선 자리이기도 하다.

궁이 아니라 일반 백성도 쓸 수 있었던 첫 전화는 1902년 가설된 서울∼인천 전화 선로다. 당시 전화 사용을 위해 한성전화소에 등록한 사람은 총 13명이었다. 대부분 고위 관료나 양반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개성, 평양, 수원 등 전국 각지가 전화로 연결되면서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친지끼리 소식을 전하며 살 수 있게 됐다.

전화를 쓰기 시작한 지 60년이 지난 1962년 9월, 한국 최초의 무인 공중전화기도 등장했다. 공중전화는 동전만 있으면 길 위에서 언제든지 통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다.

한국 최초의 무선통신 서비스는 1982년 12월 개통된 무선호출기(삐삐)였다. 호출을 보내면 받은 사람이 공중전화나 일반 전화로 회신하는 방식이다.

휴대전화 서비스(카폰)를 최초로 선보인 곳은 1984년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 SK텔레콤)다. 본래 KT 자회사였지만 1994년 선경그룹(현 SK그룹)에 인수된 이후 급성장했다. 한국이동통신은 전화선(線) 없이도 자동차에 긴 안테나를 설치하면 이동 중에 통화할 수 있는 '카폰(차량용 전화기)'을 선보였다. 카폰은 출시 첫해 2658명이 가입해 사용했다. 카폰이 진화한 휴대전화 가입자는 현재 5743만3378명(2015년 1월 말 기준)에 이른다. 31년 만에 2만1607배로 늘어난 셈이다.

첫번째 은행은 조흥, IMF 거치며 신한은행으로 통합박유연 기자

금융의 기적을 꿈꾸며

 
국내 1호 금융회사는 조흥은행(현 신한은행)이다. 1897년 2월 '한성은행'이란 이름으로 세워져 올해로 118년이 됐다. 우리나라 최초 은행으로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1호 기록을 갖고 있다. 1918년 일본 도쿄에 우리나라 은행 최초의 해외 지점을 만들었고, 1956년 증권거래소에 금융사뿐 아니라 전체 기업을 통틀어 상장 주식 1호를 기록했다. 또 1960년 금융권 최초로 노조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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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종로 서린동에 있었던 한성은행 건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불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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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종로 서린동에 있었던 한성은행 건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불타 없어졌다.
 
이후 조흥은행은 줄곧 국내 최고(最古)이자 1위 은행 자리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긴 역사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가장 큰 위기는 1997년의 외환 위기였다. 이때 대기업이 대거 무너지면서 이곳에 돈을 빌려준 조흥은행도 함께 위기에 빠졌다. 결국 정부 공적자금으로 연명하다가 2002년 새롭게 떠오른 신한금융지주에 인수된 뒤, 2006년 신한은행에 합병됐다.

그러나 역사는 단절되지 않았다. 통합 신한은행이 사명은 신한으로 쓰되, 등기상 존속 법인을 조흥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조흥은행의 역사는 그대로 통합 신한은행의 역사로 이어지게 됐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합병 전 신한은 1982년 세워져 33년으로 본래 역사는 짧지만, 조흥과 합병하면서 118년 역사를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인수·합병 당시 조흥은행 직원들은 신생 은행에 흡수된다는 자괴감에 강하게 반발했다. 전산실과 행장실을 점거한 채 장기 농성을 벌이는 것은 물론 경영진의 방관 속에 대출 자료를 숨겨 신한금융의 인수 실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신한은 급여 인상 등을 약속하며 장기간 설득하는 노력을 했고, 인수·합병 후에는 구(舊)신한 직원들을 구조흥 지점으로, 구조흥 직원들을 구신한 지점으로 순환 배치하는 인사 정책으로 화학적 통합에 나섰다.

신한은 조흥과 합병한 이후 자타 공인 국내 1등 금융 그룹으로 거듭났다. 지난해 금융 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순이익 2조원을 넘어섰다.

금융업계에서 다른 1호를 보면 국책은행에선 산업은행(1954년 설립), 지방 은행에선 대구은행(1967년 10월), 외국계 은행에선 한국씨티은행(1967년 한국 진출)이 있다.

또 생명보험사에선 한화생명(1946년 9월 대한생명으로 설립, 2012년 한화생명으로 변경), 손해보험사에선 메리츠화재(1922년 10월 조선화재해상으로 설립, 2005년 메리츠화재로 변경), 증권사에선 교보증권(1949년 대한증권으로 시작, 1994년 교보증권으로 변경)이 있다. 금융계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역사가 짧아서 수백 년 역사를 가진 금융회사는 없지만, 분야별 최초 금융회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最古 기업은 두산그룹, 종로 포목점으로 출발

김승범·정한국 기자

맨손으로 이룬 한강의 기적
1972년 울산 첫 석유화학 공단 造船·철강은 산업화 주역으로
1호 국산車는 1955년 6인승 '始發' 美軍 폐차부품 이용해 만들어내
한국車 본격적 1호는 현대 포니

 
사우디아라비아 남서쪽 파라잔. 1978년 이곳에 바닷물을 생활용수로 바꿔주는 설비가 들어섰다. 두산중공업이 국내 기업 1호로 수출한 해수(海水) 담수화 플랜트로, 하루 3만명이 이용할 수 있는 물을 공급했다. 수도꼭지에서 식수(食水)가 나오자 물 부족에 시달리던 사우디 사람들은 "인공 오아시스가 생겼다"며 '기적'이라고 환호했다. 파라잔 담수 설비는 30년 수명을 다하고 2009년 가동을 멈췄지만 기적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두산중공업은 사우디 동부 라스 알 카이르 지역에서 17억6000만달러 규모로 세계 최대 해수 담수화 플랜트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올해 말 이 공사가 완공되면 여기서 500㎞ 떨어진 수도 리야드까지 파이프로 담수를 날라 리야드 시민 350만명에게 용수(用水)를 공급한다. 두산중공업은 해수 담수화 플랜트 시장의 40%를 점유하는 세계 1위 기업이다.

이런 두산그룹은 '국내 최고(最古) 기업'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고(故) 박승직 창업주가 1896년 서울 종로에 포목점 '박승직상점'을 열면서 출발한 것이다. 1915년에는 국내 최초 브랜드 화장품 '박가분(朴家粉)'을 내놓았다. 이후 OB맥주 등 소비재 중심으로 성장했던 두산은 창립 100주년인 1996년을 기점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해 중공업 중심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이동근 대한상의 상근부회장은 "한국 산업화의 역사는 우리 기업들이 피와 땀과 눈물로 만들어낸 '국내 1호'의 연속사(連續史)"라고 말했다. 1972년 10월 울산공단에서 한화케미칼 등 9개 석유화학 공장의 굴뚝이 연기를 뿜은 게 대표적인 사례다. 이곳은 정부의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1억8000여만달러를 들여 조성한 한국 1호 석유화학 단지이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용암처럼 시뻘건 쇳물이 힘차게 흘러나온 경북 포항에 있는 포항제철 제1 고로(용광로)는 우리 손으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일관(一貫)제철소 고로이다.

이듬해 6월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독(dock ·배를 만드는 작업장)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인이 만든 1호 유조선인 26만t급 '애틀랜틱 배런'의 명명식이 열렸다. 이들은 모두 '한강의 기적'을 이룬 주역이다. 1970년대 '대한민국호(號)'는 조선·석유화학·철강 등 중화학공업을 앞세워 50년 이상 선진국에 뒤진 산업화 격차를 빠르게 따라잡았다.
 

    국내 원유 정제 시설로는 처음으로 1964년 가동에 들어간 SK이노베이션 울산 공장의 가동 초기 전경(全景).
      국내 원유 정제 시설로는 처음으로 1964년 가동에 들어간 SK이노베이션 울산 공장의 가동 초기 전경(全景).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대표는 "'대한민국 1호'는 아직도 한국 경제를 펄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생명체(生命體)"라고 말했다. 1964년 국내에서 첫 가동에 들어간 SK이노베이션의 울산 원유 정제 시설 1호기는 이후 부품은 수차례 바꿨지만 기본 외형은 그대로 유지한 채 가동 중이다. 만 50년이 지난 요즘도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하루 3만5000배럴이었던 SK 울산 공장의 생산 능력은 증설을 거듭해 84만배럴이 됐다. SK를 필두로 한 석유제품은 한국의 2대 수출 품목이다. 


    1976년 1월 판매가 시작된 현대차‘포니’. 국산화율 90%가 넘는 국내 최초의 고유 모델이다. / 1955년 생산된 1호 국산차‘시발자동차’. 미군용 지프
      1976년 1월 판매가 시작된 현대차‘포니’. 국산화율 90%가 넘는 국내 최초의 고유 모델이다. / 1955년 생산된 1호 국산차‘시발자동차’. 미군용 지프
 

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5위 자동차 대국(大國)으로 자리 잡은 우리나라에서 '1호 국산차'는 1955년 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이후 시발자동차주식회사)가 만든 6인승 '시발자동차'다. '시발(始發)'이라는 브랜드 이름부터 자동차 생산을 처음 시작한다는 뜻을 담았다. 미군용 지프 엔진을 본떠 만들며 실린더 헤드 등 주요 부품을 국산화했다. 하지만 부품의 상당 부분은 폐차된 미군차의 것을 가져다 만들었다. 한국 자동차 기업이 기획부터 생산·판매까지 책임지고 만든 고유 모델 1호 작품은 1975년 11월 1호차가 나온 현대차의 '포니'다. '포니'는 판매가 시작된 1976년 에콰도르에 5대를 수출해 국산차 수출 1호가 됐다. 

조철 산업연구원(KIET) 주력산업연구실장은 "이제는 창조적 아이디어와 고급 기술로 세계시장을 선도(先導)하는 '글로벌 1호' 제품을 얼마나 많이 내느냐에 한국 경제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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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1호 백화점은 신세계, 빵 1호는 '상미당'으로 출발한 SP

홍원상 기자

사고 먹고… 생활 바꾼 작은 기적

 
소매업과 식품·생활용품 제조업 등으로 대변되는 소비재 산업은 해당 사회의 생활수준을 보여주는 '척도'이자 '축소판'이다. 해당 업종의 역사는 우리 생활의 역사이기도 하다.

국내 최초의 현대적 소매업체는 백화점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지아백화점(1921년 설립·서울 소공동 현 롯데 영플라자 자리),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점(1930년·서울 회현동 충무로 1가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 등을 일본인이 운영하기 시작했다. 국내 자본으로 세워진 1호 백화점은 화신백화점(1931년·서울 종로2가)이나 1980년대에 없어졌다.

현존하는 1호 백화점은 신세계백화점이다. 삼성그룹은 미쓰코시 경성점 자리에 운영되던 동화백화점의 소유자인 동방생명을 1963년 인수한 뒤, 백화점 이름을 '신세계(新世界)'로 바꿨다. 신세계그룹은 국내 최초의 자체 브랜드(PB) 상품 판매, 최초의 '바겐 세일' 시작, 최초의 신용카드 도입 같은 많은 '1호 기록'을 갖고 있다. 현재 신세계백화점은 10개 점포를 두고 있다.

1993년에 국내 1호 대형마트인 이마트 창동점을 연 신세계그룹은 현재도 152개 점포를 운영하는 대형마트 1위이다.

최근 국내외 여행객 증가로 각광받는 면세점(免稅店) 가운데 대한민국 1호는 동화면세점이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동생인 신정희 동화면세점 사장은 1974년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국산 기념품 판매업체인 동화아케이드를 세워 운영하다가 1978년 동화면세점을 세웠다.

소비재 제조업 가운데는 식품 회사들의 역사가 긴 편이다. 가장 오래된 제빵 기업은 1945년 황해도 옹진에서 '상미당'으로 출발한 SPC그룹이다. 1948년 서울로 옮긴 뒤 삼립식품, 파리바게뜨 등을 세워 성장했고 지금은 빵의 본고장인 프랑스 파리에도 점포를 갖고 있다.
 

    1961년 서울 용산에 있던 삼립산업제과공사(SPC그룹의 모태)의 본사 겸 공장의 모습.
      1961년 서울 용산에 있던 삼립산업제과공사(SPC그룹의 모태)의 본사 겸 공장의 모습.
 
가장 오래된 과자 기업은 1945년 설립된 해태제과이다. 가장 오래전부터 생산되고 있는 과자는 해태 연양갱이다. 최고(最古)의 국내 등록상표는 샘표식품이 1954년 5월 간장에 쓴 상표인 '샘표'다.

대한민국 1호 라면은 삼양식품의 삼양라면(1963년), 국내 최초의 인스턴트 커피는 동서식품이 출시한 '맥스웰하우스 인스턴트 커피'(1970년)다. 오뚜기는 1981년 최초의 즉석요리 제품을, 동원그룹은 1982년 최초의 참치캔을 출시했다. 최고 생활용품 기업으로는 1945년과 47년 각각 출범한 아모레퍼시픽(당시 태평양화학)과 LG생활건강(당시 락희화학)이 쌍벽을 이룬다.

해외 수주 1호 주인공은 현대건설, 태국 고속도로 1968년에 완성

진중언 기자

건설·부동산, 모래밭의 기적

 
2012년 주거실태조사 기준으로 우리나라 아파트는 총 830만8021가구로 전체 주택(1773만3831가구)의 47%를 차지한다. 도시의 인구 과밀을 해소하기 위한 묘책(妙策)이었던 아파트가 이제 한국의 가장 보편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이다.

우리나라에 아파트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건 1930년. 서울 중구 회현동에 일본 기업인을 위한 관사로 지은 3층짜리 '미쿠니(三國) 아파트'였다.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한국식 아파트는 30년 가까이 더 지나서 탄생했다. 주인공은 1958년 중앙산업이 서울 성북구 종암동 고려대 옆 언덕에 세운 종암아파트이다. 4층 건물로 방 2칸에 거실, 주방, 창고, 발코니까지 딸린 고급 주택이었다. 집 안에 설치된 수세식 화장실은 장안의 화제가 됐다. 이 아파트는 1995년 종암선경아파트로 재건축됐다.

 

    1962년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들어선 마포아파트는 국내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로 꼽힌다.
      1962년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들어선 마포아파트는 국내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로 꼽힌다.
 

1962년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들어선 마포아파트는 국내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로 꼽힌다. 6층짜리 6개동(棟), 총 642가구 규모였다. 준공식 현장에 참석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현대식 시설을 갖춘 마포아파트 준공이 우리나라 의식주 생활에 혁명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입주가 시작됐을 때 분양률이 10%에 그쳤다. 월평균 소득 6600원이었던 당시 도시 근로자에게 월세 3500원은 부담이 컸던 탓이다. 하지만 대학교수·연예인 등이 입주하면서 분위기가 급반전돼 2년 뒤에는 프리미엄까지 붙었다.

국내 1호 고속도로는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京仁)고속도로이다. 1967년 3월 착공해 이듬해 12월 길이 23㎞ 왕복 4차선이 완공됐다. 공사비와 용지 보상비 등 총 건설비는 32억원에 달했고, 현대건설·대림산업·삼부토건 등 3개사(社)가 시공을 맡아 연인원 60만 5000명이 동원됐다. 경인고속도로 개통으로 서울∼인천 소요 시간이 1시간에서 18분대로 단축됐고, 두 도시는 한 생활권으로 묶였다.

현대건설은 1965년 9월 태국 남부의 파타니와 나라티왓을 연결하는 길이 98㎞ 고속도로 공사를 522만달러에 수주했다. 16개국 28개 경쟁 업체를 제치고 따낸 한국의 해외 건설 1호 사업이었다. 1966년 6월에 시작한 공사는 1968년 2월 끝났다. 이 사업은 공사비가 불어나 큰 손해를 봤으나 이후 국내 건설사들의 해외 건설 진출은 한국 경제성장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지난해 국내 건설사의 해외 수주액은 총 660억달러(약 72조4000억원)에 달했다.

올림픽 피겨 첫 金 김연아·최초 메이저리거 박찬호

강호철 기자

은반에서 은막까지… 한국의 꽃, 세계가 감동

"브라보! 원더풀 코리아!"
 

 

    ‘피겨 여왕’ 김연아는 2010밴쿠버올림픽에서 한국 피겨스케이팅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4년 뒤 소치올림픽에서 값진 은메달을 따낸 뒤 국민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현역에서 은퇴했다
      ‘피겨 여왕’ 김연아는 2010밴쿠버올림픽에서 한국 피겨스케이팅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4년 뒤 소치올림픽에서 값진 은메달을 따낸 뒤 국민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현역에서 은퇴했다./최문영 기자

2010년 2월 26일(한국 시각) 캐나다 밴쿠버 퍼시픽콜리세움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여자 피겨 싱글 프리스케이팅. 아름다운 선율에 맞춘 환상적이고 우아한 연기로 얼음판을 수놓은 요정의 연기에 전 세계는 푹 빠져들었다. 4분 9초 동안의 '마법(魔法)'에서 깨어나 현실 세계로 돌아온 팬들의 입에서 잠시 후 환호성이 절로 터졌다.

전광판에 새겨진 역대 세계 최고 점수인 150.06점. 역시 역대 최고 점수였던 쇼트프로그램 78.50점을 더해 합계 228.56점으로 한국 피겨 사상 첫 금메달을 안긴 주인공은 대한민국의 '여왕' 김연아(25·고려대 대학원)였다. 얼음판의 낭보는 김연아에 앞서 스피드스케이팅장에서 먼저 울려 퍼졌다. 16일 모태범(26·대한항공)이 남자 500m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빙속 금메달을 따낸 데 이어 17일 이상화(26)가 여자 500m에서 금메달을 보탰다. 이상화는 4년 후인 2014년 러시아 소치에서 한국 빙속 사상 첫 올림픽 2연패(連覇) 위업을 달성했다. 밴쿠버올림픽 이후 은퇴해 학업에 전념하고 있는 김연아와는 달리 이상화는 2018년 강원도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500m에서 사상 첫 올림픽 3연속 우승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 밖에 손연재(연세대)도 비인기 종목인 리듬체조로 한국 선수로선 처음으로 세계선수권 입상하고,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을 일궈내면서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는 스타로 성장했다.
 

 

    ①양정모는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에서 건국 이래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 ②1994년부터 17년간 124승을 올린 한국인 1호 메이저리거 박찬호. ③이상화는 2018 평창에서 한국 최초의 올림픽 3연패에 도전한다. ④LPGA 투어에서 한국 선수 최초로 올해의 선수상에 이어 상금왕 2연패를 이룬 박인비.
      (위에서부터)①양정모는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에서 건국 이래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 ②1994년부터 17년간 124승을 올린 한국인 1호 메이저리거 박찬호. ③이상화는 2018 평창에서 한국 최초의 올림픽 3연패에 도전한다. ④LPGA 투어에서 한국 선수 최초로 올해의 선수상에 이어 상금왕 2연패를 이룬 박인비.
 
 
 
 
 
 
 
 
 
 
 
 
1948년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에 처음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했던 한국은 44년 만인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 대회에서 김기훈이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동계올림픽 첫 금메달을 따냈다. 2010년 캐나다 밴쿠버에서는 쇼트트랙 외에도 스피드스케이팅과 피겨에서 올림픽 시상대 맨 위에 오르면서 겨울철 스포츠 주변국 굴레에서 벗어났다.

한국인 최초로 국제 스포츠 무대 시상식에 오른 이는 고(故) 손기정 옹이다.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2시간29분19초2로 당시 올림픽 최고기록으로 우승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여서 손기정 옹의 가슴에는 태극기 대신 일장기가 달려 있었다.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황영조(45·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는 대한민국 최초의 남자 마라톤 금메달을 안기면서 손 옹의 한풀이를 했다.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최초의 선수는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대회 남자 레슬링 자유형에 출전한 양정모였다. 여자 배구는 그 대회에서 구기 사상 처음으로 시상대(동메달)에 올랐다. 대표팀 리더였던 조혜정은 당시 외신으로부터 '나는 작은 새(Flying Little Bird)'라는 애칭을 얻었다.

프로복싱 최초의 세계 챔피언은 고(故) 김기수씨로 국내 최초 체육관인 장충체육관에서 로마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니노 벤베누티(이탈리아)를 2대1 판정승으로 꺾고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둘렀다.

구기 종목 해외 진출 1호는 프로야구 롯데 감독을 지낸 백인천(72)이었다. 백인천은 1962년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했고, 1975년 타격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백인천이 한국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MBC 청룡 유니폼을 입고 기록한 타율 0.412는 최초이자 유일한 4할 타율로 남아 있다. 이후 꾸준히 수준을 끌어올린 한국 야구는 1994년 박찬호를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로 탄생시켰다.

축구의 주류였던 유럽 무대에 처음 진출한 선수는 차범근(62) 전 국가대표 감독이다. 아시아 최고 스트라이커였던 그는 1979년 독일 분데스리가의 SG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해 '차붐'이란 애칭으로 유럽 무대를 누볐다. 종주국 영국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는 2002 한·일월드컵 4강 주역이었던 박지성(34)이 물꼬를 텄다. 
 
 

    4대 구기종목의 최초
     
 

미 LPGA 투어의 한국인 최초 우승자는 구옥희였고, 1998년 7월 맥도널드챔피언십 우승으로 첫 메이저리그 우승자로 기록된 박세리는 한국 여자 선수로선 최초로 미 LPGA 투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박인비는 2013년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LPGA투어 올해의 선수가 됐다. PGA 투어에선 2002년 뉴올리언스 콤팩클래식에서 최경주가 한국인 최초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연덕춘이 1935년 한국인 1호 프로 골퍼로 역사에 등장한 이후 60여년이 지나 한국 골프가 세계 무대의 중심에 선 것이다.

칸영화제 첫 여우주연상 전도연… 최초 근대 書店 '회동서관

권승준 기자

은반에서 은막까지… 한국의 꽃, 세계가 감동


    1949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1면에 실린 이승만 대통령의 신년사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첫 신년사였다.
      1949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1면에 실린 이승만 대통령의 신년사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첫 신년사였다./조선일보 DB

"잃었던 나라를 찾았으며 죽었던 민족이 살아났으니 새해부터는 우리가 보다 새 백성이 되어 새 나라를 만들어 새로운 복(福)을 누리도록 합시다."

1949년 1월 1일 조선일보 1면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신년사가 실렸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대통령으로서 발표한 첫 신년사였다. 조선일보는 '반세기 굴욕 전감(前鑑) 삼아 국가 수호를 맹세하자'는 제목으로 '대한민국 제1호' 대통령 신년사를 4단 크기로 실었다. 이 대통령은 1910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대한민국 제1호 박사'이기도 하다. 여성 박사 1호는 1931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를 받은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이다.

그 당시 대한민국은 오랜 식민 통치와 전쟁을 겪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지만, 미래의 발전에 주춧돌이 될 학문과 문화의 싹은 꾸준히 자라고 있었다.

최초의 국어사전은 1911년 주시경·김두봉 등이 편찬 작업을 맡은 '말모이(말을 모은다는 뜻)'였다. 편찬자들의 사망·망명 등 사정으로 출판이 무산되면서 원고본만 남았지만, 우리말을 우리말로 풀이한 최초 사전임은 틀림없다. 처음 출간된 국어사전은 1925년 나온 '보통학교 조선어사전'이다. 1906년 당시 경성 남부 대광교(전 조흥은행 본점 자리)에서는 최초의 근대식 서점 회동서관(�東書館)이 문을 열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광수의 '무정' 등도 여기서 출간됐다. 1908년에는 최남선이 최초의 근대식 잡지로 꼽히는 '소년'을 창간했다. 창간호 독자는 6명이었다.

1893년 축성식이 열린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꼽히지만, 천주교에서는 1887년에 짓기 시작해 11년 만에 완성된 서울 명동성당을 제1호 성당으로 본다. 1887년은 선교사 언더우드가 서울 정동의 한옥에서 신자 14명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새문안교회를 창립한 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에 앞서 1883년 황해도에서 인삼 장사를 하던 서상륜·경조 형제를 중심으로 조선인들이 설립한 소래교회가 있었다.

 

1907년엔 한국 최초 상설 영화관인 단성사가 문을 열었고, 1923년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가 개봉했다. 1927년엔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이 설립됐지만, 본격적 대중문화의 싹은 전쟁 후 본격 고도성장기에 들어서면서 움트기 시작했다. 1952년 세워진 신상옥프로덕션은 촬영소부터 극장까지 수직 배급 라인을 갖춘 최초의 메이저 스튜디오였다. 1961년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영화 '성춘향'은 당시 1주일 먼저 개봉한 홍성기 감독의 영화 '춘향전'과 함께 한국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초대형 스크린) 영화로 꼽힌다. 이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5)'가 처음으로 100만 관객을 넘었고,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2003)'가 첫 '1000만 관객 영화'가 됐다.

1956년에 개국한 대한민국 제1호 상업 방송국 KORCAD(HLKZ-TV)에선 제1호 TV 드라마로 PD 최창봉의 첫 작품인 30분짜리 생방송 드라마 '천국의 문'이 전파를 탔다. 5년 뒤인 1961년에는 오현경·김혜자·임현식 등이 최초의 공채 탤런트로 KBS에 입사했다. TV 드라마로 데뷔한 여배우 전도연은 2007년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첫 한국 배우가 됐고, 영화 '국제시장'의 여주인공 김윤진은 2004년 한국 배우로선 최초로 미국 드라마('로스트')에 출연하며 한국 배우들의 세계 진출 신호탄을 쏴 올렸다.

1966년엔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인 '살짜기 옵서예'(연출 임영웅)가 첫선을 보였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였던 한국이 광복 후 70년간 기적적 경제성장을 이뤘을 뿐 아니라, 그에 버금가는 문화적 성장을 이뤄낸 발자취이다.​